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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5 (00:21:23)
메르힐 베아트리체 프리드리히 3세, 줄여서 메르베, 그 아이가 불리우는 이름이었다. 강하고 존경받는 통치자인 현 국왕의 첫째 아들. 
아이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아이가 걷는 곳마다 시녀들이 붉은 카펫을 깔아주었고, 온갖 화려한 장식품이 달린 옷을 때마다 갈아입혀 주었다. 최고급 향신료를 써서 만든 음식만을 대접하였고 혹시나 다칠까 하여 항상 경비병이 따라다녔다. 아이는 그렇게 보호받으며 자랐다. 

어느날 메르벨은 성 밖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이 문 밖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곳도 이렇게 아름다운 시녀들이 카펫을 깔며 돌아다닐까? 내 옷에 붙은 보석들이 바닥에 굴러다닐까? 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나를 가르치는 검술 스승처럼 품위있고 멋진 사람들이 사는 것일까? 아이는 궁금했다. 임금은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문 밖에 나가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아이는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남몰래 궁 밖을 나간 것이었다. 

메르벨은 놀랐다. 그리고 실망했다. 환상을 가지고 겨우 나간 궁 바깥, 온 몸에 종기가 난 사람들이 신음하며 성 벽에 등을 긁고 있었다. 걸인들은 동전통을 들고 돌아다니며 상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상인들도 거친 말투로 소리를 지르기에 바빴다. 메르벨이 보기에 이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들이었다. 메르벨은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나는 고귀한 태생, 저들보다 더 성스러운 인간, 백성이라는 것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로구나. 저런 자들을 내가 앞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로구나. 

나름대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고 갈아입었지만, 주변에서 보기에 그는 너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걸인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특히나 눈이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주춤 주춤 걸어오며 메르벨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메르벨은 겁이 났다. 여인을 뿌리치고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자 이제는 술에 취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메르벨에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메르벨을 지나쳐 가다가 메르벨의 바로 앞에 푹 쓰러졌다. 그리고 경련을 일으키며 구토를 하였다. 입에 거품을 문 남자. 그가 뱉어내고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메르벨의 구두에 묻었다. 메르벨은 도저히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마구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듣고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메르벨을 금세 알아채고 얼른 궁으로 모셔갔다. 

그 후로 메르벨은 다짐했다. 소위 백성이라 하는 것, 성 밖의 인간들은 가까지 하지 않을 것이고, 감히 날 쳐다보지도 못하게 하겠다. 이 성은 아름다운 용모의 귀족들을 위해서 꾸며야지. 그들과 파티를 즐기며 절대로 이 성밖으로는 나가지 말아야지. 메르벨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악과 만나 뒤틀리고 꼬여 임금이 된 후에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백성', '국민' 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파티를 즐겼다. 항상 귀족들을 궁전의 무도회장으로 불렀고, 달콤한 과자와 핏빛의 포도주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옷의 보석은 더더욱 화려해졌고, 궁전에 정원수는 더더욱 높아졌다. 시녀들의 수는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궁 밖의 여인은 함부로 궁 안에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귀족들이 자신의 시녀들을 교육시키고 보내는 것으로 겨우겨우 충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어느날이었다. 자기 전 향료를 푼 욕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너무 뜨거워져 도저히 욕조 안에 있을 수 없었다. 불을 때는 하인을 족쳐 죽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욕조 안에서 나오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사지가 결박된 느낌이었다. 몸을 뒤틀었다. 뜨거운 물이 얼굴에 튀었다. 얼굴이 익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메르벨은 있는 힘껏 몸을 흔들었다. 얼굴을 물에 처박았다가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정신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는 잠시 탄식했다. 

그가 묶여 있는 곳은 대들보, 지금 눈 앞에 일렁이는것은 노란 불꽃과 성난 군중의 얼굴. 
자신의 처지는 화난 백성들에게 끌어내려진, 화형당하고 있는 죄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연기가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2011.04.21 23:27:22 (*.56.120.221)
wyvern

글이 화려하면서도 어두운 느낌을 줍니다. 역사서가 아닌 곳에서 폭군의 뒷이야기를 해주는 느낌인데 지금은 화형당하고 있는 처지지만 그렇게 키워지기만 한 메르벨이라 괜히 미워하기 힘드네요. 백성들의 사정이 아니라서 이런 평가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욕조와 화형장의 매치가 놀랍습니다.

2011.04.21 23:27:34 (*.56.120.221)
유즈

이야기가 진행되고 흘러가는 과정이 굉장히 스무스합니다. 끊김도 없고 주인공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정당성이 있고 독자가 보면서도 납득이 가는, 한 마디로 '설득력이 있는' 전개입니다. 갑작스럽게 흐름이 끊겨도 그것이 당황스럽다거나 끝이 보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연출로 보입니다.

2011.04.21 23:27:49 (*.56.120.221)
Nora

확실히 부패한 왕조나 귀족의 입장에서 쓰이는 글은 많이 없으니만큼 독특한 관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더 길고 풍성했더라면 그만큼 설득력이나 공감도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겠죠. 욕조에서 화형장으로 장소가 이동하는 발상이 신선했습니다만, 그 장치를 좀 더 풍부하게 꾸밀 수 있다면 더 훌륭해질 것 같습니다. 대비되는 구도(귀족↔평민, 부유함↔빈궁함, 삶↔죽음)가 돋보이는 만큼 이 구도를 더 이용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걸인'을 고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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