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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963
2011.04.05 (00:20:23)
예상한 바였지만 기현은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달랑 있는 고시촌 반지하 자취방은 불도 켜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현이 승우가 오는 것에 벌떡 일어나는 것은 술병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서일 것이다. 어서와, 하고 문을 열어주는 눈빛에도 승우보다는 술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입생 때는 마시는 척도 못 하던 술을 기현이 밥을 먹듯 마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승우는 기억하지 못했다. 본인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할 게 뻔했다. 
술병부터 집어든 기현의 눈빛이 작은 행복감에 휩싸인다. 승우는 불부터 켰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있으나마나한 부엌으로 갔다. 방 바닥은 습기가 차 축축했다. 밥솥은 예상대로 비어 있었고, 뭘 해먹은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삭하게 말라있는 부엌 벽지는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물이 썩은 냄새가 나는 창문 가에서는 거미가 움직이고 있었다. 승우는 눈으로 거미줄을 쫓았다. 얼마나 부엌을 건드리지 않았는지 거미줄이 시작하는 곳은 그릇 넣을 자리도 없어 그냥 싱크대 옆에 엎어놓은 밥숟가락이었다. 승우는 거미줄을 끊었다. 그릇들을 싱크대로 집어넣어 물을 부어버렸다. 사르르 내려앉았던 먼지가 덩어리가 되어 수챗구멍 밑으로 흘러갔다. 뒤에서 기현이 술병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잔도 필요없이 병째 들이켜버린 모양이었다. 

"작작 마셔." 

사온 사람으로써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승우는 성의없이 그런 말을 했다. 기현은 으응~ 하고 대답은 했으나 벌써 다음 병을 따고 있었다. 승우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기현이 자신의 옆에 앉는 승우를 보더니 술 너도 마실래 하고 병을 내밀었다. 승우는 고개를 저었다. 기현은 헤실거리고 웃으며 다시 병나발을 불었다. 
승우는 기현을 쳐다봤다. 이미 피마저도 알코올이 지배해버렸을 듯한 기현의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병을 쥔 손가락은 뼈에 거죽만 붙어있었다. 입에서는 소주 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왔다. 나름대로 윤기 나고 깨끗했던 기현의 머리카락은 부스스한 채 얼마나 지냈는지 덩어리째 꼬여 있었다. 부엌 꼴과 똑같은 꼴이다. 기현은 벌써 또 다 들이킨 술병을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기현의 팔에 힘이 없어서인지 그리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다. 남아있는 술 몇 방울이 쓰레기통 앞으로 흩어졌다. 
승우는 세 번째 병을 따려는 기현의 손을 막았다. 이건 내 거야. 
그 말을 들은 기현이 마치 장난감을 뺏긴 아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승우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다음엔 술을 안 사들고 올지도 모른다. 기현은 술을 다시 뺏는 걸 포기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돛대였다. 기현은 피식 웃었다. 승우가 온 뒤로 기현이 행복감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은 것은 그 비웃음이 처음이었다. 
옆에 승우가 있고, 환풍구 하나 없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기현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곧 방안에 연기가 차기 시작했지만 승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지나, 기현의 담배가 거의 다 피워질 때쯤에서야 승우가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담배 피우지 말랬잖아." 
"으응."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나 나니." 
"나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피지 말랬잖아." 
"기억하면서 또 피워." 
"영혼 그런 거 이미 없잖아. 이미 이만큼이나 피워댔는데." 

승우는 기현을 쳐다보았다. 회색 연기가 방안을 가득히 채웠다. 기현의 영혼이 방을 떠다닌다. 
그런 게 이미 없는 이유가 비단 담배를 피워서만은 아니지만 승우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현이 자꾸만 떠도는 것은 담배를 피워대서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어버린 탓이라고, 다른 게 아니라고, 담배를 끊으면 전처럼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믿는 것밖에, 승우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현에게 기대할 만한 것도 미련을 둘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 이 눅눅한 반지하방을 찾는 것은 기현이 자주 담배를 피워대기 때문일 것이다. 피워대는 연기 속에서 잃어버린 그 영혼을 찾으려 허우적대고 있는 탓이다. 
2011.04.21 23:25:14 (*.56.120.221)
꿈꾸는중

서사와 묘사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좋은 글인것 같습니다. 대사가 몇개 없는데도 캐릭터의 성격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어요.
연기속에서 영혼을 찾으려 허우적댄다 라는 표현이 현실적이면서도 약간의 신비감도 주고 좋네요.
여기서 가져올 단어는 '연기'

2011.04.21 23:25:30 (*.56.120.221)
유즈

영혼 그런거 이미 없잖아 라면서 비아냥대는 듯한 말투도 좋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눅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있긴 한다는 게 오히려 대비되서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서 가져올 단어는 "장난감"

2011.04.21 23:25:44 (*.56.120.221)
wyvern

피드백을 전부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제 글에서 마지막 단어를 뽑아야 해 다시 읽었는데, 적당하게 절망적인 곳에서는 잘 끊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성을 설명하지도, 그렇게 자세하게 생각해두지도 않았다는 점이 매우 아쉽네요.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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